천재들의 연구실.

 

 

 

고려의 마지막 천재 정몽주

 

쇼미더머니가 유행이 된지 한창이 된 시대,

화려한 디스전등과 자신의 생각을 맘껏 표현하는 힙합 정신

 

근데 그 원조 중에 하나가 바로 이분에 곡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고려의 마지막 충신.

포은 정몽주이야기 시작합니다.

 

단심가로 유명한 정몽주는 선비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은 이성계밑에서 왜구토벌에도 공을 세운 문무를 겸비한 인물입니다

 

학문·외교·경제·군사·정치·인품에서 탑 레벨을 찍은 사기 캐였죠.

 

고려말 권문세족에 대항한 신진사대부를 키우고 조선 건국에 핵심인물이된

능력자들을 배출한 이색학원에서 스승조차 정몽주의 말은 이치에 닿지 않는게

없다며 극찬했습니다.

 

그 어렵다는 과거시험을 일찍이 장원급제 했는데

세 번 시합에서 세 번 모두 장원을 받은 천재입니다.

 

초창기 정치때 기득권세력은 정도전을 욕보이기위해 왜에 노략질을 금하라는

전달을 하는 사신으로 보냅니다. 성공 가능성은 낮으나 잘 되면 좋은일이고

실패시 그냥 거기서 죽을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직전에 떠낫던 사신들 모두 몇 달째 소식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게 무슨일?

정몽주는 되려 왜의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후한대접을 받고 지내다가 심지어는

고려인 포로들까지 데리고 돌아오는 성과를 냅니다.

 

몇 년뒤에는 명나라 황제 생일 축하사절로 가게 되는데

이 일은 사실 진평중이란 위인이 사신으로 선발되었습니다.

명나라 황제 홍무제는 워낙 변덕이 심하고 심술이 있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길이었죠.

때문에 진평중은 뇌물을 바쳐 사신에서 빠지고 미움받던 정몽주가 대신 가게

됩니다. 준비해서 도착하는데만 세달이 걸리는데 남은 시간은 고작 두달.

축하가 한창 끝나고 도착해서 생일 축하한다고 하면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 홍무제 성격에 무사할 수 없다는 게 기득권세력의 계산이었죠.

 

참고로 홍무제 하면 숙청이라 할 정도로 무서운 인간입니다.

자신을 도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공신들과 그 일족을 모조리 죽였는데, 숙청이 대상이 된 사람들과 학연 등 인맥이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였기 때문에 주원장의 숙청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은 9만 또는 10만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정몽주는 친구 정도전에 도움을 받아 기일내에 당도했을뿐만 아니라

홍무제를 설득하여 되려 억류되어 있던 전임 사절들까지 데리고 돌아옵니다.

 

이쯤되면 마술을 쓴게 아닐까 정도입니다.

그정도로 외교의 달인이었죠

-

 

제자 양성도 잘해서 세종대왕의 스승인 권우가 정몽주의 제자였고 조선왕조 후반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이 정몽주의 제자였던 길재의 맥을 있기도 하였습니다.

 

 

아마 이성계 편에 섰더라면 정도전과 더불어 조선왕조에서 가장 대우받는

핵심인사가 될 수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교를 숭상한 조선에서는 비록 반대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몽주의 충절을 높이사

후손들은 조선왕조내에서도 혜택을 받았습니다.

 

사육신 사건때 정보라는 사람이 그들을 두둔하자 거열형에 처해졌는데

정보가 끌려나간후 세조가 정보가 어떤사람인지를 묻자 신하들이 정몽주의

장손이라고 대답하자 놀란 세조가 형을 중지한 유명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후에는 오히려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지만 역적으로 찍혀 푸대접받은

정도전과 달리 정몽주는 처음 무덤은 승려들이 묻어줘야 할 정도였지만 이후에는

왕릉에 준할정도로 우대받고 조선시대 폭군들조차 정몽주에 후손들은 연좌되는 것을

피하게 할정도로 특혜를 입었습니다.

 

당시 정몽주가 고려에 가진 영향력이 엄청났는데요. 조선개국에 가담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조준에게 조견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조선 개국에 대해서 조준이 동생을 설득하려 하자, 조견이 "또 정몽주는 이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인만큼 만약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그와 달리하기를 구한다면 이것은 국사를 해치는 것이고 나라가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입니다.

라고 할정도니 고려의 마지막 정신적 지주였다고 봐도 될정도입니다.

 

이 잘난 사람은 자식농사마저 잘지어서 그의 아들 정종성은 고려말 아홉효자 중 한사람에 들기도 합니다. 정보사건으로 가문이 기울었으나 후에도 자손들이 과거에 급제해 벼슬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대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왕을 보필할 재주라 하여 왕좌지재라고 칭했고

현재는 경기도 용인시에 수지구를 관통하는 국도명이 이 정몽주의 호를 따서

포은대로로 명명되어 있습니다. 또한 대규모 문화시설인 포은 아트홀과 포은아트갤러리

역시 그의 호를 따서 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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