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 영어가 안좋은 이유와 영어를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 영어로 말하기.
문법을 가르치고/배우고 한국어로 바꾸는 건 분명 안 좋은 방법이지만, 단지 문법이 있기 때문에 '가르치기 수월'하고, 번역을 하기 때문에 '결과물이 존재'하며, '평가하기 쉽고', 영어로 말 한 마디 못하는 교사라고 해도 저런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강단에 세워서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써먹는 거야. 학교 영어 교사들 중 영어로 말하고 듣고 의사소통 자유자재로 되는 선생들 별로 없잖아? 그나마 요즘에는 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많은 영어교사일수록 십중팔구 문법에만 도사일 뿐이지, 벙어리에 귀머거리지.
문법번역식 교수법은 원래 라틴어 등의 사어(死語)를 학습할 때나 쓰는 방법이고,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서 들어온 학습 방법이야. 핀란드 공교육계도 이런식으로 가르치다가 방법 바꾸고 핀란드 학생들 영어실력이 확 뛰었다는 내용 방송으로 소개된 적이 있어. KBS 스페셜 당신이 영어를 못하는 진짜 이유,
사람들은 영어로 씌어진 문장이나 글을 대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영한사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걸로 모르는 단어를 다 찾아야 독해를 위한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문법적으로 문장 구조를 파악하는 것으로 본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모든 영문을 한국어로 바꾸면서 해석이라는 것을 한다. 그리하여, 그 작업이 끝났을 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영문 대신 한국어 문장이 남고, 독해를 제대로 했다는 마음에 흐뭇함마저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독해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번역이다. 독해란, 말 그대로 읽어서 이해하는 작업이다.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번역을 해서 이해하는 작업은 궁극적으로 국문 독해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영문을 영어 그대로 어디서든 멈추거나 하는 일 없이 죽 읽으면서 독해를 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 제대로 연습만 하면, 이제까지의 지난한 가짜 독해 작업과 작별할 수 있다. 그것이 되어야 비로소 영어실력을 궁극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바탕이 생기게 되는 것이고, 그 비법은 결국 영어로 된 책이나 글을 많이 읽는 것이다. 기존의 번역식 독해법으로는 평생 한 권의 영어책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못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문자를 먼저 접했기 때문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 시작은 서로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임을 무시한 것이다. 일부러 그랬다기 보다는 과거 일제시대에 영어가 처음 수입되었을 때부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인이나 영국인들을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을 것이고, 학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겠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래서 영어권 사람들과의 소통이 아니라, 영어로 된 책이나 자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법을 가르치고 어휘 암기를 한국어로 시키고 한 것들이 크게 틀리지 않아 보인다. 영문을 전부 우리글로 바꾸어 놓을 수만 있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이 될테니까. 그 과정은 그래서 이렇게 된다. 일단 모든 단어를 한국어로 바꿔 놓는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영한사전이 필수적이다. 다음 영문법에 따라 그 단어들의 관계를 알아낸다. 즉, 품사와 시제 등등을 따져 우리 글의 구조로 바꾸는 것이다. 그 다음 우리 글답게 매끄럽게 손질하는 것으로 최종 마무리를 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문장은 우리 글이므로 이해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일컬어 우리나라에선 영문 독해 혹은 영문 해석이라고 한다.
문법과 어휘.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라고 하면 당연히 떠올리는 이것들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쉽게 습득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어의 어원과 영어의 어원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문법의 경우 그 용어만 하더라도 생소하기 그지없다. 언어학자들이 수백 년간의 연구를 통해 언어를 분석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니 일반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될 리도 없다. 영어는 게다가 어순도 다르고 우리 글에는 없는 어법도 많다. 그러다 보니, '뭐뭐 했었는데, 뭐 했고, 그래서 막 뭐뭐 한 것이다'라는 식의 이상한 해석까지 등장할 때도 있다. 어휘는 또 어떤가. Vocabulary 22,000이니 뭐니 하는 굉장한 어휘집을 달달 외우고, 영한사전을 깡그리 씹어먹어도 알 수 없는 단어가 수시로 등장한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한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은 왜 그리도 많은지. sorry 하나만 하더라도 '미안하다', '유감이다', '안됐다' 등등에서부터 드물지만 '너 잘났다'까지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다 다르다. 우리말로는 미안하다면 그냥 미안한 것인데 말이다. 이 대목에서 왜 독해라는 말보다 해석이라는 말이 훨씬 많이 쓰였는지 이해가 간다.
결국, 영문 해석을 잘하게 되기까지는 골치 아픈 문법을 완전히 소화하고 숱한 어휘 암기를 거쳐야 된다는 얘긴데, 그렇게 얼마나 해야 별 무리 없이 마치 우리 글 읽듯 쉽게 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문법이든 암기한 어휘든 간에 세월이 가면서 점점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릴 텐데. 그걸 쫓아다니며 복원하면서 가다보며 한 세월 다 보내고 늙어버리지는 않을까? 생전 영어 한 번 잘해보지도 못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무식하게 하지 않아도 영문 독해력은 짧은 시간 안에 금방 습득된다.
영어 생각만 하면 문법과 어휘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자신과 머나먼 나라 얘기처럼 여겼던 사람들조차도 여기 소개하는 방법대로만 하면 별도의 추가 어휘나 문법 공부 없이 독해가 바로 곁으로 다가온다. 마치 살가운 이웃처럼.
사람들은 언어라는 용어도 모르면서 말을 하기 시작하고 마찬가지로 독해라는 말도 모르는 채로 독해라는 작업을 배우고 스스로 발전시켜나간다. 이 말은 문법이나 어휘 암기 같은 인위적인 작업 없이 그렇게 한다는 뜻인데, 물론 어린 아이들이 모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걸 좀 더 분석적으로 들여다보면 이렇게 된다. 일단 뱃속에서부터 무려 10개월 동안을 듣고, 나와서도 한 삼 년간 하염없이 각종 수준의 언어 구사를 듣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말문이 터진다. 그렇게 될 때까지 엄마 아빠를 포함해서 아기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무슨 언어학 전공자가 아니며,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체계적인 언어 교육학적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아기에게 언어를 가르치진 않는다. 그런데도 아기는 어느새 말을 익혀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하는데 그 발전의 속도는 가히 기하급수적이어서 예를 들면 아빠는 출장 한 번 갔다 올 때마다 늘어난 아이의 말솜씨가 신기하기 짝이 없다.
말문을 뗀지 얼마 되지도 않아 우리나라 엄마들은 때로는 급한 성질 때문에 혹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그 엄청난 교육열 때문에 아이에게 글 가르치기를 시도하는데, 이 때쯤 집 안 여기저기 이름 가진 모든 물체와 장소는 자신의 이름표를 딱 아기 눈 높이에 달고 있게 된다. 거기 큼직한 고딕체로 씌여진 이름들은 아기가 어디를 가건 붙어있어서 그것들을 보지 않고 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기들이 그걸 싫어할 이유도 없는 것이 대충 통박으로 잘 맞추기만 하면 엄마 아빠로부터 한없는 사랑의 눈길과 칭송과 뽀뽀를 받는다. 그렇게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말의 세계에서 보이는 문자의 세계로 시나브로 빠져들게 된다.
아이가 그런 이름 정도는 우습게 여길 때쯤, 그러니까 어느 샌가 집 안에서 이름 쪽지들이 보이지 않게 되면, 엄마들은 그림책을 본격적으로 아이에게 제공한다. 화려한 원색 칼라로 아이들을 확실하게 유혹하는 그런 책에는 사물의 이름 뿐만 아니라, 아이가 늘 접하고 행하는 각종 행위에 대한 문자도 나온다. 좀 명석한 아이들은 이미 그때쯤 그냥 보는 대로 읽을 줄 알게 된다. 물론 자음이니 모음이니 발음법이니 하는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채로다. 일단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책을 보기 시작하는데, 그 스토리는 대부분 이미 기어다니기 전부터 엄마 또는 아빠가 배겟머리에서 자기 전에 읽어주었던 아주 익숙한 것들이다. 모르는 단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아주 드물다. 그렇게 아이들은 점점 책의 수준을 높여가며 책 속에 빠져들고, 나중에는 별의별 장르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어휘에 대한 어려움 한 번 피력하는 법이 없이 다 소화해낸다. 그러니까, 문법이나 어휘 공부를 별도로 하지 않고도 진정한 독해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 시작은 집집마다 조금 다르긴 해도 대강 여섯 일곱 살 때이다. 이 나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단, 어른들에 비해 지적 능력이 한참 낮다. 단순히 언어 습득면에서만 보자면, 고 녀석들은 문법이니 어휘 암기니 하는 쪽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다면, …할게' 라거나 '…했으니까, …했어' 따위 고등 문법이 적용된 문장을 구사하며, '우주의 괴물'이나 '육지의 왕자한테 반해버린 인어공주' 같은 어려운 어휘도 그냥 알아먹는다. 어떤 아이도 국어사전을 뒤적거려가면서 동화책을 보지는 않는다. 이 현상은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는데 예를 들면 다 커서야 무협지의 맛을 알게 된 사람이 생전 처음 보는 무슨 대협이나 자의 소녀니 철사장, 천령혈 따위의 어휘를 접하고도 절대 사전을 찾아보지 않는 것이 그런 것이다.
모국어의 독해가 그렇게 이루어졌는데 왜 영어에서는 안 되는 것일까? 아니 왜 안 된다고 다들 추호의 의심도 없이 생각해왔을까?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해 보인다. 그러니까 한 번도 문법을 따지거나 어휘 번역 없이 독해를 시도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문을 접하는 그 순간부터 줄곧 문법과 어휘 해독을 통해서만 독해를 해왔기 때문에, 으레 그렇게 해야 하는 줄로 믿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또 그렇게 된 데에는 언어를 의사소통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가 또 다시 원죄다. 왜냐하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 독해의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말을 글자로 표현한 것이 글이므로 따라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얘기는 글도 해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영문 독해는 아직 시작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대목에서 좀 의아한 생각이 들 것이다. 무슨 소리냐. 말은 못 알아들어도 그걸 글로 써 놓으면 훨씬 이해하기 쉽던데… 유감스럽게도 그 이해는 이해가 아니다.
누군가가 모국어로 말을 할 때, 사람들은 그냥 듣는 행위만으로 그 말을 이해하려고 한다.
너무나 당연한 걸 설명하려니 표현이 이렇게 이상해진다. 그러니까 청취 이해, 영어로 listening comprehension이라고 하는 것은 들음으로써 이해함을 말한다. 듣는 것 외의 어떤 다른 행위도 필요 없다. 상대방의 말이 끝났을 때 그걸 되새김질하며 다시 회상해야만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만약 그 때에 이해가 안 되었다면, 잘못 들었거나 잘 안 들렸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한국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청취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식이 모자라서이다.
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어로 쓰여진 글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은 그 글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모른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우주선을 만드는 법에 관한 책을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 책을 읽기 위해서는 물리학, 지구 과학 등의 학문을 꽤 깊이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본 온갖 용어들이 등장하고 각종 난해한 수식이 수록되어 있는 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용어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야 하고 수식이 무슨 이치를 나타내는지를 배워야 한다. 그러니까, 배경 지식을 아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그런 책을 독해할 수 있다. 그런 내용을 말로 해도 상황은 똑같다. 청취 이해가 거의 불가능하다. 뒤집어보면, 아는 말은 쉽게 독해할 수 있는 글이 되며, 어려운 글은 모르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듣고 알게 되는 것과 읽고 이해하는 것은 일맥상통한다. 말과 글의 기능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문법과 어법도 큰 차이가 없고, 말할 때 쓰는 어휘는 기본적으로 모두 글자로 나타낼 수 있다. 다른 점이라면, 글은 눈으로 볼 수 있으므로, 말보다 글이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질 수 있다는 점 정도다. 바꿔서 말하면, 일반적으로 말이 글보다 더 간단하며 따라서 이해하기가 더 쉽다. 사람들이 간단한 내용은 주로 전화나 대화로 해결하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말을 하는 것이 글을 쓰는 것보다 일반적으로 더 쉽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영어는 그 반대라고 하니 정말 이상하다. 청취는 잘 안 되지만, 독해는 좀 된다는 사람들 무진장 많다.
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잘 안 되는 청취'는 들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무슨 '소리'인지 못 들었다는 뜻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말한 사람이 무슨 단어를 썼는지, 어떤 구조의 문장을 구사했는지조차 제대로 못 들었다는 얘기다. 마치 주변이 시끄러워서 그렇게 된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가 한국말을 하기는 했는데 부정확한 발음으로 웅얼거리면 잘 알아듣기 힘든 것과 같다. 그런데, 만약 그 말을 다시 정확한 발음과 어조로 바꾸어 말해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이해한다. 만약, 영어를 좀 더 천천히 또박또박 굴리지 않고 말해주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해가 더 쉽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러니까 시간이다. 소리를 다 듣는다 하더라도 독해가 리스닝보다 쉽다는 얘기는 눈으로 쓰인 단어와 문장 구조를 볼 수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모르는 단어를 영한 사전으로 찾을 수 있고 문법을 따져서 전후좌우 사정을 분석해낼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이해의 정도는 완벽에 가까워진다고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말을 할 때도, 아주 천천히, 한국말로 바꿀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해준다면, 훨씬 잘 이해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중요한 단초가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리스닝이든 독해든 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어라는 걸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라는 수단을 늘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즉, 언제나 번역이라는 중간 작업을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청취 이해보다는 독해가 쉽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말을 천천히 한다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글은 어떻게든 다 읽어볼 수가 있지만, 말은 결국 끝까지 다 듣지를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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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이건 지난한 작업이다. 따라서 말을 듣고 있거나 글을 읽고 있는 동안에 그걸 한다는 것은, 말이나 글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이 생성될 시간이나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영어를 들을 때 첫 번째 말 한마디 번역하려다가 다음 말을 모조리 놓치고 마는 상황이 벌어지고, 영문을 읽을 때 영한사전 뒤적이고 복잡한 구조 따지느라고 한 페이지에 한 세월 보낸다는 아주 슬픈 이야기다. 이쯤 되면, 영어의 효용가치가 심각한 치명상을 입는다. 그 정도밖에 안 될 바에는 차라리 아예 영어를 모른다는 편이 자존심 면에서나 금전적인 손익 계산 면에서나 훨씬 유리하다. 그것은 마치 부쉬맨을 우리가 만났을 경우 가지는 느낌과 같다. 부쉬맨의 언어를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창피한 느낌이 들 리가 없고, 그 언어를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므로 억울하지도 않을 터이다. 부쉬맨과 우리는 아마 손짓, 발짓, 그림 등을 가지고 의사 소통을 시도할 것이고 번역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영어를 들을 때 번역이 필요 없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듣자마자 대답하는 사람들이다. 영문을 읽었을 때 영한사전이 필요없는 이들은 또 누굴까? 나중에 한국어로 읽었는지 영문으로 읽었는지 헷갈리는 사람들이다. 내용은 남고, 매개 수단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번역을 통해 리스닝을 하고 독해를 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는 한국어를 매개로 내용을 취한 것이다. 따라서, 영어 청취 이해나 영문 독해를 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 번역이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오해가 생길 것이다. 우리나라 출판계를 지속적으로 휩쓸고 있는 각종 번역 소설과 에세이류 속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상한 한국어도 그로 인해 생긴 고질병이다.
결국 어휘력이나 문법 실력이 독해의 기본은 절대 아니다. 의구심이 들거든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라. 언제부턴가 손에 잡았던 동화책을 보면서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 문장 구조 따위에 신경이 쓰여 못 읽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냥 빠져들어 감동 받다 보니 어느 새 다 읽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 그 때, 모르는 단어, 복잡한 문장 구조 같은 게 없었을까.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해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는 얘기는 독해가 잘 되었다는 뜻이다. 그 나이에 문법을 알 리도 없었을 테고, 어린이용 국어사전 같은 것을 찾아볼 수도 없었을 것이니, 당시의 독해에 어휘력의 부족이나 문법에 대한 무지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아직 머리가 굳지 않은 나이기 때문에? 어떤 언어학자가 말했던 '자동 언어 습득 장치'가 활발하게 작동하는 때여서?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을 정도로 신기한 이 현상에 대한 언어학적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독해에 관한 한 아이나 어른이나 똑같은 메커니즘으로 작업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어휘를 중심으로 문장을 파악하고 문맥을 읽어 줄거리를 소화하는 과정은 애나 어른이나 독해할 때 똑같이 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볼까.
'바다 속에 인어가 살고 있었습니다. 상반신은 사람과 똑같이 생겼지만, 하반신은 물고기 몸통과 꼬리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인어는 호기심이 참 많아서, 바다 위로 올라가 세상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처음 이 글을 읽은 아이들은 아마도 상반신, 하반신, 호기심을 몰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인어' 하나 뿐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머릿속에 새겨진 정보는 '인어'와 '사람 같은 물고기' 정도로 압축될 것이다. 상반신, 하반신을 몰라도 그 모습을 상상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것이다. 또, '호기심'을 몰라도 그들은 '인어가 바다 위로 자주 올라갈 것'이라는 정보를 얻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들의 머릿속에는 '사람과 물고기를 반반씩 섞어놓은 인어라는 것이 바다 속에 사는데, 자주 바다 위로 나온다'라는 지식이 생성되는 것이다. 거의 완벽한 독해이지 않은가. 이제 어른들의 경우를 한번 볼까.
'인터넷의 발달로 이제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 시간과 장소의 구분 없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정보를 원하는 형태로 교환할 수 있는 완벽한 소통의 자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사람이 인터넷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독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아주 간단하게 이 글이 전하는 정보를 정리할 것이다. '아하. 인터넷이라는 정보 전달 수단이 생긴 모양이군.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쉽게 쓸 수 있는…' 이것 역시 나무랄 데 없는 완전한 독해다. 그가 설사 가방끈이 짧아 예컨대 '정보', '소통' 같은 단어를 모른다 하더라도, 그는 '수시로 쉽게 쓸 수 있는 인터넷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만난다' 정도는 알게 된다.
이렇게 어떤 글이 전하는 정보를 알아내는 행위가 독해라는 작업이며, 그 작업의 결과는 독자 나름대로의 재구성된 내용이다. 문자 하나 하나의 의미를 다 새겨서 번역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글이 전하고자 하는 정보만 정확하게 이해하면 독해의 목적은 달성된다. 사실 그렇게 해야만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기존의 영문 독해식으로 책을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통으로 글의 정보를 알아내는 전통적인 독해의 방식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의 문맥으로 글이 전하고자 하는 정보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통으로 읽는 것이다. 통독이라고 하는 이것은 꼼꼼히 읽는 정독의 사전 작업이며, 사실, 모든 학습의 기초작업이다. 공자왈, 백번 읽어 이해되지 않는 글이 없다고 한 것도 바로 이 통독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통독의 '통'자는 바로 통박 '통'자다. 아닐 것 같다구? 아님 말고.
독해를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테스트는 기본적으로 글을 읽을 줄 아느냐에 관한 문제다. 그러니까 쉬울 수밖에 없다. 토익이나 토플 같은 경우는 영어가 외국어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어서 더더욱 그렇다. 같은 종류의 시험이지만 국어시험의 난이도가 훨씬 높은 것은 모국어와 외국어라는 차이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능 언어 영역의 국어 시험 문제를 보면 단순히 글의 내용을 물어보는 문제보다는 한 수 위의 문제가 대부분이다.
국어 시험에 그런 문제가 나오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문자를 읽는다는 수준 이상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국어 시험을 국어 독해 시험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다. 그런데 모국어의 수준이 그정도는 되어야 한다면, 외국어인 경우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영어든 독어든 불어든 중국어든 일어든 간에 그 정도는 되어야 그 언어로 된 문자 정보를 제대로 습득할 수 있지 않을까.
외국어로 된 글을 모국어처럼 읽어나간다는 것은 '모르는 어휘'나 '어려운 문법'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어와 한국어로 이야기하자면 분명히 영어로 된 글을 읽고 있는데 거기서 받는 느낌은 한국어로 씌어진 것을 읽을 때와 별반 차이를 모르고 있다는 얘기다. 분명히 영어로 읽었는데 나중에는 한국어로 읽었노라고 착각할 수도 있는 상태가 되면 어휘니 문법이니 문장 구조니 하는 언어학자들에게나 필요한 이상한 말들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게 된다.
그런 환상적인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그렇게 된다. 많이 읽어라. 그러면 그런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받거나 혹은 사전을 펼쳐보지 않고도 오로지 계속 읽으면 된다. 초등학생은 초등학생 수준에 맞는 영어 동화책을 한 권당 여러 번씩 많이 읽으면 되고, 중학생, 고등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영어 소설, 영자 신문 등의 인쇄 매체를 부지런히 접하면 된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모국어로 된 글을 읽는 속도나 영문을 읽는 속도나 별다른 차이를 못 느끼게 된다. 주제에 따라서는 영문 소스가 더 잘 이해되기도 한다. 나중엔 결국 번역서를 읽기보다는 원서 읽기를 더 선호하게 되는데, 그 정도 되면 영어는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니다. 그냥 언어일 뿐이다.
발음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소리내어 읽어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소리내어 읽되, 소곤거리듯 하라. 좌우간 눈으로 문자를 보면서 입으로 소리를 내라.
그래야 하는 첫번째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한국어로 해석하는 버릇이 사라지지 않으며, 두 번째 이유는 소리내어 읽다보면 혀에 영어가 익숙해지는 아주 좋은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읽지 말고 반드시 앞에 누군가가 누워있다고 생각하라. 어딘가가 아파서 오랫동안 누워있는 환자인데 그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책을 읽어주고 있다고 여겨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읽다보면 어느새 감정 이입이 되어 언젠가 들었던 영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어조와 말투가 자기 것으로 변환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열 권만 끝내라. 영문 독해는 더 이상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로 의식 속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다.
요즘 영어책 시장을 보면 참 안타깝다. 모처럼 듣기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살아있는 영어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듯 하더니만, 다시 예전의 문법, 어휘, 암기 위주의 영어로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라고는 보다 화려한 장정과 문체와 편집 뿐, 그 내용은 결국 귀머거리 영어, 벙어리 영어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변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방식을 버리지 못하다는 것을 노린 것이다.
토익이나 토플 시험에 관한 책들은 더 심각하다. 이젠 제목마저 감각적이어서 웬만한 사람들이면 다 넘어갈 것 같아 보인다. 안을 들춰보면 역시 페이지 디자인 끝내주고 종이 질 또한 장난이 아닌데, 결국 내용은 문법 설명하고 한국말로 풀어주는 식 그대로다. 언제까지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 통할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사람들이 그들의 그 두꺼운 책을 대부분 끝까지 못 볼 것이므로 그런 책들의 나쁜 효과 또한 대부분 끝까지 모를 것이다. 우리글로 설명이 되어 있으니 읽을 때는 속이 시원하고 아는 것 같지만, 막상 아무런 밑줄도 칼라도 해설도 없는 진짜 시험지를 만나면 그 책을 보기 전과 마찬가지로 막막할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 때문에 하고 있는 방황은 여전하다. 학교 영어는 일단 점수 따기로 넘기고, 대학교에 가서는 살아있는 영어를 해보겠다고 여러 이름난 학원들을 다녀보기도 하지만 영어는 느는 것 같지 않고 꾸준히 가게 되지도 않아 잠시 포기하고, 고학년이 되면 취업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다시 점수 위주로 토익 공부하러 학원 다니고, 비싼 어휘 책, 문법 책 사서 열심히 외우고, 그래도 안 되면 여러 영어 학습법 책 다 읽어보고 가장 그럴듯한 것 골라서 그대로 한 번 해보고… 도대체 한도 끝도 없이 이런 저런 영어를 찾아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듯이 고생 고생하며 몇 년을 헤매다보면 어디 가서 영어공부 그렇게 많이 했다고 얘기하기도 창피스러운 수준 때문에 절망하고. 점수는 점수대로 별로 오르지도 않고, 의사소통 하는 것은 꿈도 못 꾸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어는 말이다. 많이 듣고 많이 읽고 많이 말하고 많이 써보면 저절로 실력이 팍팍 느는 모국어와 똑같은 종류다. 많이 듣지 않으면 결코 듣는 대로 알아들을 수 없고, 많이 말해보지 않으면 결코 그들이 알아듣는 영어를 말할 수 없으며, 많이 읽지 않으면 절대로 읽는대로 이해하는 수준이 될 수 없으며, 많이 쓰지 않으면 절대로 자판 치는대로 글이 되는 실력이 될 수 없다. 그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단 한 가지 원리는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 단계만 넘어서면 나오는대로 문법 어법에 딱딱 맞고, 생각나는 대로 느낌가는 대로 영어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겠냐고? 많아봤자 어른들은 1년, 아이들은 3년 이내에 그렇게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외우면 외운 것밖에 못하고 결국은 잊게 되며, 한국어로 바꾸는 영어는 영어가 아니라는 것. 잊지 말고 속지 말자.
"아는 단어만 가지고 독해를 하면, 모르는 단어는 영원히 모르는 채로 남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동화책 읽을 때 사전을 전혀 찾지 않고도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는 단어가 신문이나 책 혹은 잡지에 나왔다고 해서 국어사전을 뒤져보지는 않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대강 무슨 뜻인지 짐작만 하고 넘어가고, 그 단어를 여기저기서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점점 자세한 의미 혹은 정체를 알아가게 되는 과정을 밟습니다. 영어 단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영어 단어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나라 영어 학습법에서 늘 단어 암기를 우리말로 하라고 했기 대문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만 읽고 이해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의 한국어 표현을 모르면 뭔가 미진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지난 9.11 사태 직후 영어 방송이나 신문에 Anthrax 라는 생소한 단어가 갑자기 등장했습니다. 전후좌우 설명으로 보아 어떤 질병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증상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졌습니다. 아마도 원어민들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Anthrax 라는 새로운 병을 알았다는 정도로 넘어가는 거죠. 그런데, 똑같이 그 정도에 이르러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게 한국말로 뭔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이미 영어 설명으로 그 병의 증상과 심각성을 다 알고도 굳이 '탄저병'이라고 해야 속이 시원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탄저병이라고 우리나라 신문에 처음 나왔을 때도 그게 뭔지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병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 결국 그 상태는 영어로 읽었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죠. 다시 말하면, 영어 설명을 읽고 이해를 했는데도 뭔가 불분명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 영어 설명에 동원된 이미 알고 있는 의미의 단어들마저도 아직은 충분히 자기 것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어책을 자꾸 읽다보면 일반적인 어휘의 '체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그런 것들을 더 이상 굳이 한국말로 바꾸지 않게 되고, 그 이후에는 모르는 단어들을 아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게되며, 그때부터는 이해를 하고도 뭔가 모호한 느낌이 사라집니다. 새로운 어휘를 알게 되었다는 확실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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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박으로 독해를 하다보면, 정작 문법이나 관용 표현 같은 것을 간과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요?"
그냥 눈으로만 보면서 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통박 연습의 초창기에는 소리내어 읽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우선, 소리를 내어 읽느라고 한국어로 번역할 여유가 없어집니다. 그 다음엔 혀에 영어를 올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어느새 자신의 귀에 자신의 목소리로 영어를 하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됩니다. 그 사이에 아주 자주 등장하는 문장 구조와 표현들이 입에 익고, 귀에 익게 되며, 그 다음엔, 그걸 기반으로 해서, 종종 등장하는 표현이나 구조에 익숙해집니다. 궁극적으로 문장 중에 낯선 형태가 거의 없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되면, 그게 바로 문법을 통찰하고, 관용 표현을 익힌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해야만, 굳이 외우지 않아도 오래 오래 남게되고 실제로 쓸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제로 해보면, 기존의 방식에 비하면 훨씬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 될 수 있으며, 게다가 자신감을 가지고 그 지식을 활용하게 됩니다.
기존의 방식으로 하면 사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듭니다. 그 이유는 우선 외워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다시 책을 펼쳐서 기억을 복원해야 합니다. 문장이 조금만 복잡해져도 문법적 지식을 총동원해야 비로소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관용 표현 같은 것은 그 숫자가 또한 만만찮게 많아서 외워도 외워도 끝이 없는 길을 가야합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렇게 해서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걸 이용해 작문을 한다거나 말을 할 때 자신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장을 외우기만 했지, 그 변용에 대한 연습은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우선 한국말로 하고자 하는 표현이 떠오르기 때문에 그걸 번역하는 방식으로 영어를 만들게 되어 도대체 영어식의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소위 문법 도사, 걸어다니는 사전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영어 작문이 어딘가 이상하고, 그들의 영문 번역을 그대로 쓸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게 다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기본적인 문법 지식과 어휘력이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을 말하는 것인가요?"
문법의 기본 지식이 있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명사, 동사, 형용사, 관계대명사 같은 문법 용어를 몰라도 문장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단어들이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국어를 배울 때를 생각해보면 잘 이해가 됩니다. 아이들이 모국어로 된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소리로만 배운 말을 글자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문장 구조에는 익숙해져 있어서 굳이 품사가 어쩌구, 구조가 저쩌구 하는 설명이 필요 없다는 얘기죠. 영어의 경우, 알게 된 과정은 다르지만, 어쨌든 중학교 일학년을 마친 정도면, 그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기본 어휘력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보는 사물의 이름과 하는 행동, 느낌에 대한 표현을 영어로 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엄마, 아빠, 형, 동생, 누나, 언니, 아저씨, 아주머니, 친구 등과 같은 호칭과, 사과, 배, 딸기, 우유, 밥, 김치 같은 영어로 하든 한국말로 하든 뜻이 변하지 않는 물건의 이름과, 간다, 온다, 먹는다, 잔다, 산다, 입는다, 벗는다 등의 행동, 동작과, 기쁘다, 슬프다, 좋다 싫다 등의 감정 표현 등등,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삶 속에서 쓰이는 말이 영어로 무엇인지 굳이 우리말로 바꾸지 않아도 그대로 이해되면 기본 어휘력이 있는 것이죠.
"영한사전을 가지고 독해 연습을 해도 결국 실력이 늘긴 늘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실력이 늘기는 합니다. 문제는 느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늘 한국어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렇게 바꾸는 시간만큼 독해가 느려지고, 또 그만큼 영어 문장 자체에 익숙해지가 어려워서, 영어 문장만 보고도 독해가 되는 수준이 될 때까지 장구한 세월을 요합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마지막 수준에 이르러서도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꼭 한국말로 바꾸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못된 버릇까지 생깁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영한사전 자체의 문제점 때문입니다. 이미 여러 번 밝혔듯이, 우선 잘못된 의미의 수록이 여전히 많고, 실제로 많이 쓰이는 의미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는가 하면, 아예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단어가 나오는 문장을 영한사전을 가지고 독해를 하게 되면 독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데, 하고 있는 사람은 정작 그것을 몰라 결국 엉터리 독해를 하게 되죠. 영어 문장 그대로 독해를 할 수 있다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영한사전 독해로 결코 습득할 수 없는 것 마저 있는데, 예를 들면, 문학적 뉘앙스나 미묘한 느낌 같은 것입니다. 영어로 된 많은 컨텐츠를 접하다 보면 생기는 그런 것들은 중간에 한국어가 끼어드는 한 절대로 생성되지 않습니다. 영미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작품들을 읽을 때 영한사전을 쓰면 안 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단어의 의미를 우리말로 외웠다 하더라도 좌우간 많이 알면 독해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닌가요?"
답은 예, 아니오 둘 다입니다. 그 의미가 제대로 된 것이고, 많이 쓰이는 것이라면 예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그 의미로 인해 문맥을 읽는 데 방해가 됩니다. 또, 앞서 말했듯이 그것을 영한사전을 소스로 한 것이라면, 그로 인한 문제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그러나 좌우간 독해를 함에 있어서 우리말을 개입시킨다는 것입니다. 영문의 진정한 독해, 즉, 영어 문장을 그냥 죽 읽음으로써 독해도 끝나는 상태는 영원히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문법을 잘 알면 모르는 것보다 독해에 도움이 되지 않나요?"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지나치면 오히려 좋지 않습니다. 각각의 단어가 각자의 위치에서 가지는 기능 정도만 알면 독해하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난해한 품사의 이름, 문법적 해설에 쓰이는 각종 언어학적 전문 용어까지 꿰고 있는 이도 있습니다. 아마도 문법 해설책을 너무 많이 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데, 그런 지식은 독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하고 있는 독해를 위한 문법 수업, 정확하게 말하면 번역을 위한 문법 수업은 사실 자연스러운 독해를 심각하게 방해합니다. 모든 단어의 품사를 따지고 문장 형식을 규정하여 따라서 무엇이 무엇을 꾸미고, 서술하고, 지칭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독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 다시 한국어를 영문 독해에 개입시키는 것이며, 읽다가 말고 멈춰서 단어와 단어, 단어와 구, 구와 절의 문법적 관계를 따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문법 지식은 영어 문장에 익숙해지는 방법으로 습득이 되며, 그 수준이 되면, 독해 실력은 오히려 문법보다는 상식이나 지식의 보유량에 의해 우열이 가려집니다.
"아는 단어만 가지고 독해를 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건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해왔던 독해는 모르는 단어 위주의 독해였습니다. 먼저 모르는 단어를 골라내고 그걸 영한사전에서 찾아서 여백에 혹은 노트에 써놓은 다음 그걸 보면서 한국어로 다 바꾸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건 번역이지 독해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모국어로 된 글을 독해할 때는 모르는 단어를 그냥 무시해버립니다. 바로 그것이 또한 영문 독해의 키입니다. 여러분이 어릴 때 그렇게 했고, 지금도 어린 아이들은 그렇게 새로운 동화책들을 섭렵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어휘가 늘고 책의 수준도 높아졌을까요? 원리는 이렇습니다. 아는 단어만 가지고 책을 계속 읽다 보면, 그것들은 더 이상 사고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체화됩니다. 그 단어들은 새롭게 나타난 단어들과 직간접적인 관련 하에 있어서 뇌세포는 자동으로 그 관계상을 해부하고 분석하여 의미에 접근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희미하던 의미는 다시금 다른 글이나 책에 등장하게 되고 그렇게 중첩된 희미함은 결국 명징한 이미지나 개념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걸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경험하는 방법이 바로 같은 글을 여러번 소리내어 읽는 것입니다. 불과 며칠이면 위에 설명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통박으로 독해를 하다가 틀리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물론 있습니다. 특히 문장 하나만 가지고 할 때에는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독해를 해야 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그 길이가 한 개의 패러그래프 정도 혹은 그 이상이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할 여지는 매우 작습니다. 에세이나 소설을 읽을 때에는 길이가 충분하여 통박 독해의 오류가 있어도 궁극적으로 해소되며, 토익이나 토플 등의 독해 문제를 풀 경우엔 문제와 보기에 대개 지문에 대한 정보가 어쨌든 담겨 있어서 또한 그 오류 가능성을 줄여 줍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번역 독해의 오류보다는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영문이라고 해도 종류가 많은데, 그 차이에 따라 독해 방법을 달리 해야 하나요?"
독해의 원리가 같으므로 방법도 같습니다. 다만, 독해 작업을 할 때 초점을 달리하게 됩니다. 신문이나 잡지 같은 종류의 영문은 사실과 정보의 전달을 목표로 씌어진 만큼, 핵심만 파악되면 독해는 사실상 끝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합니다. 에세이 종류는 저자의 사고방식, 철학, 메시지가 포인트입니다. 하나하나의 주장과 그에 대한 예시, 근거를 연결시켜 저자의 생각의 바탕과 논거를 이해하면 됩니다. 소설의 경우는 우선 줄거리를 따라갈 수 있는 정도면 됩니다. 그 문학성 섭취까지 끝나야 소설 즐기기가 완성되지만, 줄거리만 제대로 알 수 있으면, 작가의 사상과 저작 의도를 호흡할 수 있습니다.
시험에 나오는 지문은 그 종류가 더욱 다양해서, 위에 든 것 외에도 광고, 편지, 메모 등까지 포함됩니다. 그러나 어쨌든 시험에 나오는 영문은 냉정하게 말해서 독해 작업을 제대로 할 필요가 없는 경우입니다. 문제와 보기부터 보고, 통박 기술을 최대한 동원하여 빠른 시간 내에 정답을 찾아내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객관식 시험을 치면서 문장을 음미할 심정적 의무를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죠.
"토익이나 토플 관련 책이 요즘 굉장히 많이 나와있는데, 올바른 책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제대로 된 사람을 고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선, 표지의 장정이나 편집 디자인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물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좋은 내용에 더하여 그런 것들까지 받쳐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그리고, 재치 있는 광고 카피나 책 제목에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 속에 담겨있는 학습법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입니다.
먼저, 문제의 유형에 따른 정답 맞추기 요령 위주로 가르치는 책은 점수 확보 차원에서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만 의존하면 고득점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두 번째로 신중해야 할 종류가 두께가 두꺼운 책입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연구도 상당히 많이 하고, 설명도 자세하여 꽤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십중팔구 돈 낭비 시간 낭비로 귀결됩니다. 설명이 많기 때문에 책이 두꺼워진 건데, 그 설명이 다 '번역 잘하기'입니다. 그래도 다 보고 나면 마음만은 뿌듯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그 다음 순간 별로 남아 있는 게 없다는 자각으로 괴롭겠지만 말입니다.
한국어 번역이 영문마다 붙어있다면 그것 역시 절대 금물입니다. 어휘 암기와 문법 연구의 함정으로 깊이깊이 끌고 들어갈 테니까요. 어쩌면, 시중의 책들이 모두 위에 든 예 중 하나에 해당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간단합니다. 대신 모의 테스트나 여러 개 사서 자주 풀어보세요. 연습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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